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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장 수집

한 글자 사전 - 김소연

by 나는된다 2021.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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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만나는 것을 행운이라고 하고 이것을 맞추는 걸 능력이라고 한다.

 

 

일요일 정오, <전국노래자랑>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출연자에게 들려주었던 한 음절.

 

 

힘의 마지막 단계, 젖 먹던 힘은 배짱에서 악착으로, 그리고 오기로, 그다음 깡의 순서로 버전업 되어간다.

 

 

'반드시'라고 표현하면 어딘가 권위적으로 보이고, '당연히'라고 표현하면 어딘가 건성으로 여겨지고, '제발'이라고 표현하면 어딘가 비굴하게 보이고, '부디'라고 표현하면 너무 절절해 보여서, 건조하지만 정갈한 염원을 담백하게 담고 싶을 때 쓰는 말.

 

 

여기에서는 꿈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지만 꿈속에서는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루와 하루 사이에 끼인 면도날 같은 하루. 하루로 익어가기 이전의 날것인 하루.

 

 

'있다' 혹은 '지다'라는 말 앞에 붙여 쓸 때만 진짜다.

 

 

휑하지만 않다면 가장 좋은 상태.

 

 

내 오른손에 만져지는 왼손

내 왼손이 느끼는 오른손에는

애인의 손맛에 취해서 청춘을 망친 자들이

요약되어 있다

 

악기

숨구멍

마음을 감싼 이 부대자루를 조여맨 자국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의 증언대

'안다'라는 말의 산 증인

오래도록 밟아서 만든 길

본래의 천성을 어지럽힌 장본인

그럼에도 불구한 내 천성의 실마리

 

말보다 솔직해서

말보다 미더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한번도 받지 못한

이해라는 걸 받아보았으므로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을 누렸던 손

 

마음의 바람기

마음의 육갑

마음의 단도직입

마음의 주인나리

만지는 쓰는 전화를 걸로 그의 발을 씻어주고

주먹을 쥐는 형제를 염하는

때리는 훔치는 속이는 묶는 뜯고 찢는

은밀함의 극치이며 드러남의 극치인

마음의 가장 비천한 식객

마음의 천형

 

손이 먼저 저지른 죄들로

인류는 날마다 체한 채 지구를 돌린다

종생토록 죗값을 치러도

손이 있는 한 반성하지 않으며

김소연, <손> 전문

 

 

편파적이어서 배가 아프곤 하지만 이것은 거품이지 거름이 아니다. 지속성이 없다.

 

 

품을 들이면 들인 만큼 결실을 거둘 수 있고 품이 넓으면 넓은 만큼 사람을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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