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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장 수집

전국축제자랑 - 김혼비&박태하

by 나는된다 2021.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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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힘을 믿든 말든

    

     충남 예산

  의좋은형제축제

 

· 그건 정말 우연이었을까 ·

 

하지만 우리에게도 동심이 시험받는 순간이 있었다. 무대 옆 천만들 중 한 곳에 들어가 막걸리에 파전을 먹고 있을 때였다. 프로그램 사이에 시간이 떠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 놓기 위해 애쓰던 사회자가 한 커플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두 분이 너무 다정하게 서 계셔서 눈에 계속 띄었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중·장·노년층 아니면 아이 동반 가족이 대부분이 축제장에서 20~30대 커플은 눈에 계속 띌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거기에 계속 서 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사회자가 그들에게 어디서 왔고 어떤 관계냐고 물을 때까지만 해도 이 막걸리가 어디서 왔고(아랫동네인 청양군에서 온 '탁선생 생막걸리'였다.) 막걸리와 파전의 관계는 어떤가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우리는 커플 중 남자의 대답에 마시던 막걸리 잔을 탁 놓아버렸다.

"사실 오늘 프러포즈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요."

뭐? 프러포즈? 여기서? 지금? 갑자기? 우리뿐 아니라 파전을 부치던 아주머니와 그 옆에서 장난스럽게 지청구를 놓던 할머니와 학생 경연 대회에 참가하러 와서 김밥을 오물거리던 고등학생들과 볏짚 옆에서 악수를 주고받던 유관 기관 관계자 여러분의 고개가 무대 쪽으로 일제히 돌아갔다. 남자는 머뭇거림 없이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 계속 서 있었어도 절대 그러지는 않았을) 우리가 막걸리고 파전이고 다 팽개치고 무대 앞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는 반지를 꺼내 무릎을 살짝 꿇으며, 진짜로, 했다. 프러포즈를. "나랑 결혼해 줄래."라고······.

가마니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와,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했다.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의좋은형제축제에서 프러포즈를 받고 싶지 않은 여자,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훤하디훤한 오전 11시에, 비에 젖은 볏짚이 꽃잎 대신 흩어져 있고 흙바닥은 질척거리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못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용포를 입은 세종대왕까지 왔다 갔다 하는 이 축제장이야말로 프러포즈의 표본 같은 시공간 아니겠는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민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청계천 청혼의 벽 같은 곳에서라면 도시인들의 과장된 박수와 환호가 울려 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풍경이 퍽 생소할 어르신과 꼬마 들은 기력이 달리거나 남사스럽거나 어색하거나 하는 각자의 이유로 조용히, 하지만 따스하게 박수를 보내 주었고, 이런 장면에서 기대되는 반응을 사회적으로 학습한 자들로 우리는 약간 과하다 싶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게 된다······. 신이 난 사회자는 "저도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라며 무대 한편에 마련된 경품들 중 벌꿀을 골라 와서 여자에게 건넸다.

"답례로 남자 친구에게 주세요."

그렇지! 프러포즈에 대한 답으로 결혼 승낙과 함께 지역 특산 명품 벌꿀을 받고 싶지 않은 남자,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두 팔로 벌꿀을 꼭 그러안은 채 활짝 웃으며 포즈까지 취해 주는 커플을 뒤로하고 우리는 천막으로 돌아와 막걸리를 쭉 들이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온 거지······?”

그러니까! 저게 진짜 우연일까? 사회자랑 미리 짰겠지?”

“그치?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앞에 딱 있었고,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사회자가 말을 붙였단 말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반지를 갖고 있었고! 대체 누가 주머니에 프러포즈 반지를 넣고 축제장에 오겠어?”

그러니까! 근데 짠 게 맞다면······ 주최 측은 이 프러포즈가 축제에 무슨 대단한 플러스 효과를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럼 거꾸로······ 저 남자는 축제에서의 프러포즈가 무슨 대단한 플러스 효과를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니까, 대체 왜······ ?”

마술을 속임수고 사기고 거짓말이고 뻥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들이 품을 법한 짙은 의혹과 그래도 내심 우연이기를 바라는 우리의 달달한 낭만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미리 짠 이벤트였다고 해도 축제에 재밌는 장면 좀 넣고 싶어서 그러는데 너희 여기에서 프러포즈 안 할래?”라는 주최 측 누군가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다는 건(아무래도 이게 우리가 생각한 가장 개연성 있는 전개였다.) 그래도 좋겠다고 판단해서 그랬을 테고(물론 “의좋은형제축제에서 프러포즈를 하면 사채의 반을 탕감해주겠다같은 협박성 제안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의좋은형제축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협박의 조건으로 쓰일 정도라면 그건 그거대로 굉장하다.) 그렇다면 사정이야 어떻든 이 축제가 그들에게 프러포즈의 현장으로 기억되리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때로는 어설프고, 때로는 키치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 혼잡한 열정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마음 같은 것을 우리는 결코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그마저도 낡고 촌스러워진 진정성이라는 한 단어로 일축해 버리기에는 어떤 진심들이 우리 마음을 계속 건드린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도 남들 못지않게 거기에 절망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또 때로는 비웃는 ‘K스러움도 결국은 그 마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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