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열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내게는 매일 밤 일기를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이 익명의 온라인 일기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절대 답장하지 말 것. 둘째, 되도록 매일 남길 것. 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 이미 답장을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될 만한 일은 늘 규칙이 깨질 대 생겨나곤 하는 법. 어느 깊은 밤 누군가의 실시간 혼맥 기록에 뒤이어 맥주 한 캔의 사진이 답장처럼 전송되거나, 아픈 가족을 간병하는 이를 위한 걱정의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질 때, 노동의 고달픔과 가난을 고백하는 이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할 때, 나는 혼자임에도 여럿이 된다.
남편에게 보낸 일라의 도시락이 정년퇴직을 앞둔 사잔에게 잘못 배달되면서, 일라와 사잔의 편지 교환은 시작된다. 일라는 정성스레 만든 도시락을, 사잔은 싹싹 비운 도시락통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주고받는다. 어느새 두 사람은 편지가 든 도시락 통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낸다. 턱을 괴고 앉아 허공을 응시하다가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무미건조하던 두 사람의 일상이 기다림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사랑이란 기다리면서도 이토록 즐거운 것. 일라가 배달부에게 도시락이 잘못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대신 짧은 메시지를 동봉했을 때부터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대화만으로 사랑에 빠지곤 하니까.
4년 전 베를린, 먹고사는 것 외에 어느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외국 생활에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기차를 잘못 탔는데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홀로 차창만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되돌아갈 수도, 도중에 내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존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결정도, 책임도 오롯이 내 몫인 외국 생활은 나를 철저히 혼자라는 걸 느끼게 했다. 대화가 사라진 몸과 마음은 척박한 땅 그 자체였다.
당시 내게 필요했던 건 SNS 전시용 유럽 일상이 아닌 한국에서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지속되는 먹고사니즘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그래도 넌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잖아.'라는 말이 되돌아올 걱정 없이, 유럽 생활 이편의 아름다움과 저편의 고단함을 솔직하게 나눌 상대가 있었다면 조금은 덜 외롭지 않았을까. 이 열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옆 좌석 정도는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이제 와 짐작해 본다.
늘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남편을 둔 일라와 아내 없는 세상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잔에게도 시시콜콜한 일상이나 삶의 고단함을 나눌 상대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외로움이란 의외로, 접촉의 부재가 아닌 대화의 부재로 생겨나는 감정이니까.
'오늘 오후 기차를 탈 거예요. 어디서 읽었는데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두고 봐야죠.'
아무도 찾지 않는 책방을 홀로 지킬 때나, 쉬지 않고 나아가는데도 돌아보면 늘 제자리일 때, 나는 여전히 기차에 잘못 올라탄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기차를 잘못 탔는데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차창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문득 두려워진다. 직장을 다니거나 결혼 후 아이를 낳아 돌보는 친구들에게 불평을 하자니 어쩐지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까 봐 목구멍까지 차오른 신세한탄을 꿀꺽 삼킨다. 하지만 베를린에서처럼 외롭진 않다. 다정한 인사나 살가운 대화가 오가진 않지만, 허울이 아닌 나의 진짜 일상과 생각을 읽어주는 사람이 적어도 10명은 있으니까.
오늘 밤에도 온라인 일기장에 나의 하루를 기록한다. 답장은 기다리지 않는다.
'어디서 읽었는데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메시지 옆에 하나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각기 다른 열차에 올라탄 열 명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나는 혼자였다가 금세 여럿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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