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누가 결혼 생활을 '안정'의 상징처럼 묘사하는가.
결혼이란 오히려 '불안정'의 상징이어야 마땅하다.
2
'결혼 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에게 결혼 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다. 생활 패턴, 식성, 취향,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한 정도, 여행 방식, 하물며 성적 기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나중에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지?'로 변해갔지만.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 경우, 오히려 그 이질감이 애초에 서로를 끌어당겨 사랑을 불살라 단숨에 결혼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살펴보면 실제로도 안 맞는 사람들끼리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은 왜 이렇게 두 사람을 짝지어주는 것일까.
인간 좀 되라고?
결혼 생활을 가급적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나는 서로의 '안 맞음'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초연해지며, 그것이 일으킬 갈등의 가능성을 피하려는 훈련을 본능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결혼 생활은 분명 일종의 인격 수양이라 할 수가 있겠다. 다만 때로는 수양이 과해진 나머지 '난 네가 그걸 원하는 줄 알아서 그렇게 했다고!'라는 식으로 불똥이 튀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기 위한 양보와 희생조차도 '안 맞는' 경우를 맞닥뜨릴 때면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힘없이 웃음만 새어 나왔다.
5
나는 평소 혼자 다양한 것들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예로, 그가 외국으로 출장을 갈 때면 여지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여보세요? ○○○씨 가족분 맞으시죠?"
불길한 전화벨 소리가 울려 받아보니 병원이나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다. 어쩌면 뉴스 속보를 보았을 때부터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갑작스럽게 비행기 추락 사고로 배우자를 잃은 충격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과 비애를 느낀다. 하지만 벽에 기대어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와중, 미량의 감미로움도 놓치지 않는다. 최소한 그의 죽음엔 나의 부채 의식이 1그램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나 며칠 후면 다음과 같은 전화가 걸려 온다.
"뭐 해? 나야. 방금 인천공항 도착했어."
안도와 더불어 느껴지는 약간의 아쉬움. 아내들의 이런 작은 살의가 남편들의 명을 늘린다.
하루는 그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의 이런 속내, 혹은 백일몽을 알 턱 없는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늙어서 아프면 내가 다 간병해 줄 테니까. 너 가는 길 힘들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진지한 말투로 보아, 그는 내가 먼저 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지병도 있고 평소 여기저기 골골하지만 여섯 살이나 많은 사람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단정 지어버리면, '처연한 과부'가 은은한 장래 희망 중 하나인 나는 몹시 곤란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런 다짐을 한 게 은근 뿌듯하고 대견한가 보다.
22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가급적 집에서 탈출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남편과 아이로부터. 가정과 생활의 그 모든 것들로부터.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껍데기뿐인 사람으로 지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설의 세계 속에서 1년씩이나 살 수가 없다. 소설을 쓸 때 내 영혼은 어쩔 수 없이 소설의 세계가 차지한다. 다만 껍데기뿐이라도 관성의 힘을 빌려 몸은 가급적 가정에서 맡은 역할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려고 애쓴다. 가끔은 애쓰는 것조차 하기가 싫지만.
남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신간을 소개하며 올린 글을 읽었다.
"아내가 새 소설을 냈다. (중략) 나는 아내가 쓴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에세이를 포함해 그이가 쓴 스무여 권의 책 가운데 딱 두 권을 봤다. 그 책에는 우리 딸이 주요 등장인물이어서였다. 그래도 벌써 다섯 번째 소설이니 나름 고정 팬은 몇 분 있지 않나 싶다. 아내가 건강하게 오래 글을 썼으면 좋겠다. 아내가 책을 내느라 정신이 없을 때가 나도 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작가의 남편으로 사는 남자만이 할 수 있는 투정이자 복수일 것이다. 나는 가끔 순하고 덜 예민한 여자가 그의 아내였다면 참 좋았을 것을, 이라며 내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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