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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10

언어의 온도 - 이기주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꼽히는 안톤 체호프가 쓴 희곡 중에 '벚꽃 동산'이라는 작품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봉건 귀족 사회가 붕괴하고 신흥 부르주아가 부상하는 과정을 날카롭고 처연하게 그린 작품이다. 몰락한 지주 라네프스카야는 호화로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남은 거라곤 곧 경매에 부쳐질 벚꽃 동산뿐이다. 하필 왜 벚꽃 동산일까. 안톤 체호프는 어떤 이유에서 벚꽃 동산을 희곡의 무대로 삼은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한껏 흐드러지게 피다가 일순간 꽃비를 흩뿌리며 사라지는 벚꽃이, 짧디짧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친척들이 라네프스카야에게 변화를 강요하면서 이야기의 갈등이 고조되고 극은 막바지로 치닫는다. 그녀의 .. 2021. 3. 14.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 이기호 제발 연애 좀 해 "너 K형 기억나?" "K형? 아, 그 우리 단과대 학생회장 하던 형." "그래, 맞아. 그 형······ 그 형 얘기 우리 많이 했었잖아?" "그게 벌써 몇 년 전 얘기야. 이십 년도 훨씬 전 얘기잖아." "한 이십오 년 됐나? 근데 내가 얼마 전에 우연히 그 형을 만났다는 거 아니냐."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 밤에 전화까지 해? 새벽 한 시가 넘었어, 상식아." "그 형도 많이 늙었더라. 배도 많이 나오고 이마도 벗겨지고······ 그 형 옛날엔 참 뾰족하고 날이 서 있었는데." "계속 그 형 얘기할 거야? 나 내일 여덟 시까지 출근해야 한다고." "내가 그날 그 형하고 반가워서 맥주까지 한잔했거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그 형이 우리.. 2021. 3. 13.
평범한 결혼 생활 - 임경선 대체 누가 결혼 생활을 '안정'의 상징처럼 묘사하는가. 결혼이란 오히려 '불안정'의 상징이어야 마땅하다. 2 '결혼 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에게 결혼 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다. 생활 패턴, 식성, 취향,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한 정도, 여행 방식, 하물며 성적 기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나중에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지?'로 변해갔지만.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 경우, 오히려 그 이질감이 애초에 서로를 끌어당겨 사랑을 불살라 단숨에 결혼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살펴보면 실제로도 안 맞는 .. 2021. 3. 12.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을 걷는다. 습관, 다름, 그리고 머무는 빛 1 균형 잡힌 삶을 사는 데는 습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습관을 옷처럼 입고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보다는 사소한 일에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다. 더 심각하고 흥미로운 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더 복잡한 일은 하루 더 기다리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한 문제들은 바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통해, 그 현명한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하게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우리를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숲속의 새나 산언덕 위의 여우는 사소한 것을 위해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습관은 옷 같은 것이.. 2021. 3. 12.
우리가 돈이 없지, 안목이 없냐? - 아무개 가난하다고 왜 철학이 없겠는가? 안목 나, 자신 있게 말하건대 결코 안목이 없지 않네. 오히려 나의 높은 안목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왕왕 있는 걸. 가격표를 보지 않고 그저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르면 여지없이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니 말일세. 그러니 내가 안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네. 그런데 내가 가진 물건들이 하나같이 왜 그따위냐고?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이네. 내 경제적 형편을 고려해 물건을 골라야 하기에 높은 안목대로 물건을 살 수 없는 노릇이라 하면 믿어주려나. 철저하게 가성비 (가격 대비 성능)를 고려한 소비를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말하려니 목이 메는구먼.) 안목이 있니, 없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는 것일.. 2021. 3. 12.
아침의 피아노 - 김진영 5. 아침 베란다에서 거리를 내다본다. 파란색 희망 버스가 지나간다. 저 파란 버스는 오늘도 하루 종일 정거장마다 도착하고 떠나고 또 도착할 것이다. 13.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 14.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24. 모든 것이 꿈같다. 그런데 현실이다. 현실이란 깨지 않는 꿈인 걸까. 그 사이에 지금 나는 있다. 50. 꽃들이 찾아와 모여 앉아서 철없이 웃는다. 이런 아침 꽃들이 더 많이 피는 건 비 오면 따라오는 먼 허공의 빛 때문일까. 아즈텍 사람들에게 빛의 신과 비의 신은 하나였다.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마침내 지나간다는 것.. 2021.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