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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10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 이미화 이 열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내게는 매일 밤 일기를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이 익명의 온라인 일기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절대 답장하지 말 것. 둘째, 되도록 매일 남길 것. 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 이미 답장을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될 만한 일은 늘 규칙이 깨질 대 생겨나곤 하는 법. 어느 깊은 밤 누군가의 실시간 혼맥 기록에 뒤이어 맥주 한 캔의 사진이 답장처럼 전송되거나, 아픈 가족을 간병하는 이를 위한 걱정의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질 때, 노동의 고달픔과 가난을 고백하는 이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할 때, 나는 혼자임에도 .. 2021. 3. 11.
그러 날도 있다 - 마스다 미리 강해진다고 꼭 세상에 찌드는 건 아니야. 진홍색 정열 새로 배우기 시작한 태극권. 포즈를 잘 기억하지 못해 분투 중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태극권은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강좌 중 하나인데 탈의실 광경이 몹시도 유쾌하다. 플라멩코 의상으로 갈아입는 사람 옆에 발레 수업을 마치고 의상을 벗는 사람이 있다. 거기에 뒤섞여 태극권 팀도 옷을 갈아입니다. 평일 낮인 이유도 있어서 수강생들은 내 엄마뻘 세대인 50대와 60대가 중심이다. 화사함보다는 '왁자지껄'한 공간이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저녁 반찬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우는데, 항상 나도 모르게 집중해서 듣는다. 즐거운 대화만 있진 않다. 질명이나 간병에 관한 이야기도 들린다. 특히 간병 이야기는 고생이겠다 싶어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있다. 다만, 그런 말이.. 2021. 3. 11.
잘돼가? 무엇이든 - 이경미 prologue 이건 그냥 하는 농담이지만 인생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혼자 끼적였던 지난 15년의 부끄러운 기록들을 모았다. 이제 나의 철없고 부실한 농담들이 계획대로 가지지 않는 사람에 지친 누군가에게 작은 웃음이 되면 참 좋겠다. 그럼, 덕분에 나도 정성 들여 크게 웃고 다음 인생으로 넘어가 보겠다. 어정쩡한 태도가 모든 일을 그르친다. 오늘 그 어정쩡한 태도 때문에 헤어스타일을 그르쳤다. 과감한 쇼트커트를 꿈꾸면서, '쇼트커트가 좋은데 너무 짧은 건 싫어요!' 그런데 '머리를 기를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렇지만 '혹시나 짧은 단발 느낌이 나는 건 싫어요.' 이랬다가 정말 어정쩡한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연말 다 망했다. 2010. 12.. 2021. 3. 11.
모월모일 - 박연준 1 여름밤은 익어가기 좋고, 겨울밤은 깊어지기 좋다. 봄밤은 취하기 좋고 가을밤은 오롯해지기 좋다. 당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엇이' 익어가고 깊어지는지, 취하고 오롯해지는지 묻는다면? '무엇이든'이라 대답하겠다. 사랑, 미움, 한숨, 그리움, 희망, 불행. 진부하게 거론되지만 원래 그 의미가 무거운 말들은 밤에 한층 더 무거워진다. 겨울밤은 그중 더 무겁다. 겨울밤에는 특별한 게 있다. -《모월모일》 「밤이 하도 깊어」 중에서- 2 결국 행복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다. 소소한 창작에 몰두하거나 고요한 내면을 돌보기 위해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는 일이다. 우리는 작은 행복을 잊고 살다, 일상이 비틀어질 때에야 비로소 '진짜 행복'을 생각해보는지도 모른다. 평생 '큰 행복'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른.. 2021.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