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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장 수집

[나의 문장 수집] 호-정보라

by 나는된다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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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토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의 미발표 데뷔작 『호』.

구전설화로 이어져 오던 ‘구미호’의 이야기를 현대적 로맨스 판타지, 호러로 버무린 작품이다.

그동안 작가의 약력에서만 존재했을 뿐, 베일에 싸여 있던 작품인데, 읻다 출판사의 장르문학 브랜드인 ‘포션’에서 출간되어 예스24 크레마클럽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전설의 고향을 즐겨봤던 나로서는 구미호를 현대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해서, 흔한 이야기겠지 싶으면서도 바로 집어 들었었다.

그런데 이 현대판 구미호 이야기가 너무 재밌는 것이다. 절대로 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상 속 사람들 사이사이에 이야기가 촘촘히 박혀 있다. 뻔한 신파적 요소 없이 생각지 못한 참신한 전개로 사랑을 말한다.

난 이 작품을 통해 정보라 작가의 오랜 팬이 되고 싶어졌다.

가볍게 2시간 정도면 호로록 다 읽을 분량의 책이다. 올여름 이 현대판 구미호 이야기와 함께해 보면 좋겠다.

 

-출판사 책 소개-

서로의 곁에 끝까지 남고 싶었던 한 남자와 구미호의 사랑 이야기

•한 남자와 구미호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 이야기

『호』는 로맨스 판타지, 호러 장르의 소설이다. 총 3개의 부에 20매 안팎의 짧은 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이어진 웹소설의 문법에 가까운 작품이다. 『호』를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여우에게 홀린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구미호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남자를 사랑한 끝나지 않는 여우의 사랑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호』가 특별한 건 ‘남자’가 ‘여자’의 정체가 여우임을 알면서도 사랑했다는 것이고, ‘여우’ 또한 과거에 인간 남자에게 배신당했음에도 다시 한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여우’는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남자 앞에 몇 번이고 나타난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문장처럼, 『호』는 사랑이란 정말 알 수 없다는 말을, 인연이란 정말 알 수 없다는 말을, 로맨스와 호러를 잘 반죽해서 만든 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있다.

 

•슬프고 고단하지만 아름다운 소설

정보라 작가가 『호』를 쓴 건 15년 전이다. 2008년,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였던 작가는 러시아에서 급하게 귀국한다. 그리고 외할머니를 돌보면서 ‘구미호’라는 이야기를 현대적인 로맨스로 바꿀 생각을 한다. 『호』에는 주인공 ‘기준’과 ‘여우’의 사랑도 존재하지만, ‘기준’과 ‘여우’의 만남을 반대하는 ‘할머니의 사랑’도,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애쓰는 기준의 사랑도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사랑이 다른 하나의 사랑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 되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슬프고 고단하다. 매일 심야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학원 강사 ‘기준’의 인생도, 메이크업 아티스트로도 일하고 간호사로도 일하고 학원 강사로도 일하면서 아무도 믿지 못하며 사는 구미호 ‘지은’의 인생도, 손자가 걱정되어 쉽게 눈감지 못하는 ‘할머니’의 인생도, 모두 다 슬프고 고단하다. 그렇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연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생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청혼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사람한테는 긴 세월이야. 사람은 너무 빨리 늙어, 너무 빨리 죽어…….”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은 씨가 원한다면, 평생 다른 사람들한테 지은 씨 얘기 절대로 안 할게. 자신 있어.”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이야. 늙어서 치매가 와도, 지은 씨한테도 지은 씨 얘기 절대로 안 할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나랑 결혼하면 첫날밤에 간을 빼 먹힐 거야. 그래도 좋아?”

“간은 90퍼센트 잘라내도 나머지 10퍼센트만으로 복원이 된대. 교육 방송 다큐멘터리에서 봤어.”

“난 100퍼센트를 원하는데?”

“그럼 100퍼센트 다 줄게.”

“자기 정말 단단히 홀렸구나.”

그녀는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가 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나중에 제정신이 들면, 목숨이 아까워지는 날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마.”

 

부적

“좋은 사람이에요, 할머니. 착하고, 예쁘고, 절 좋아해요.”

“‘사람’이 아니잖니.”

“…….”

“설마 너도 모르는 건 아니지?”

“하지만…….”

할머니가 그의 변명을 막으며 잘라 말했다.

“알면 어서 헤어져라.”

“그렇게 무섭지 않아요, 할머니. 무조건 그러지 마시고…….”

“내가 그 애가 무서워서 이러는 줄 아니?”

“…….”

“네가 아직 그 애의 본모습을 못 봤구나.”

“봤어요…….”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아예 못 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떻든?”

“그렇게 무섭지 않았어요…….”

“무서운 게 문제가 아니지 않니. 사람 같더냐는 말이다.”

“…….”

“넌 결혼이 너 혼자 하는 일인 줄 아니? 그런 걸 집안에 들이면, 이 집안이나 네 피붙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 안 해봤어?”

“어떻게 되다뇨, 걘 그런 짓 안 해요…….”

“얘가 단단히 홀렸구나.”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누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사람이 되고 싶었어. 해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걸, 나도 해보고 싶었어, 그 사람이 당신이라서.”

“지은아…….”

“함께 있어서 행복했어. 당신도 나만큼 행복했어?”

“지은아, 이러지 마…….”

“행복했던 거,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녀는 내 눈앞에서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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