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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5

평범한 결혼 생활 - 임경선 대체 누가 결혼 생활을 '안정'의 상징처럼 묘사하는가. 결혼이란 오히려 '불안정'의 상징이어야 마땅하다. 2 '결혼 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에게 결혼 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다. 생활 패턴, 식성, 취향,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한 정도, 여행 방식, 하물며 성적 기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나중에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지?'로 변해갔지만.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 경우, 오히려 그 이질감이 애초에 서로를 끌어당겨 사랑을 불살라 단숨에 결혼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살펴보면 실제로도 안 맞는 .. 2021. 3. 12.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을 걷는다. 습관, 다름, 그리고 머무는 빛 1 균형 잡힌 삶을 사는 데는 습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습관을 옷처럼 입고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보다는 사소한 일에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다. 더 심각하고 흥미로운 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더 복잡한 일은 하루 더 기다리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한 문제들은 바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통해, 그 현명한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하게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우리를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숲속의 새나 산언덕 위의 여우는 사소한 것을 위해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습관은 옷 같은 것이.. 2021. 3. 12.
우리가 돈이 없지, 안목이 없냐? - 아무개 가난하다고 왜 철학이 없겠는가? 안목 나, 자신 있게 말하건대 결코 안목이 없지 않네. 오히려 나의 높은 안목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왕왕 있는 걸. 가격표를 보지 않고 그저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르면 여지없이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니 말일세. 그러니 내가 안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네. 그런데 내가 가진 물건들이 하나같이 왜 그따위냐고?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이네. 내 경제적 형편을 고려해 물건을 골라야 하기에 높은 안목대로 물건을 살 수 없는 노릇이라 하면 믿어주려나. 철저하게 가성비 (가격 대비 성능)를 고려한 소비를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말하려니 목이 메는구먼.) 안목이 있니, 없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는 것일.. 2021. 3. 12.
아침의 피아노 - 김진영 5. 아침 베란다에서 거리를 내다본다. 파란색 희망 버스가 지나간다. 저 파란 버스는 오늘도 하루 종일 정거장마다 도착하고 떠나고 또 도착할 것이다. 13.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 14.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24. 모든 것이 꿈같다. 그런데 현실이다. 현실이란 깨지 않는 꿈인 걸까. 그 사이에 지금 나는 있다. 50. 꽃들이 찾아와 모여 앉아서 철없이 웃는다. 이런 아침 꽃들이 더 많이 피는 건 비 오면 따라오는 먼 허공의 빛 때문일까. 아즈텍 사람들에게 빛의 신과 비의 신은 하나였다.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마침내 지나간다는 것.. 2021. 3. 12.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 이미화 이 열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내게는 매일 밤 일기를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이 익명의 온라인 일기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절대 답장하지 말 것. 둘째, 되도록 매일 남길 것. 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 이미 답장을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될 만한 일은 늘 규칙이 깨질 대 생겨나곤 하는 법. 어느 깊은 밤 누군가의 실시간 혼맥 기록에 뒤이어 맥주 한 캔의 사진이 답장처럼 전송되거나, 아픈 가족을 간병하는 이를 위한 걱정의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질 때, 노동의 고달픔과 가난을 고백하는 이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할 때, 나는 혼자임에도 .. 2021. 3. 11.
그러 날도 있다 - 마스다 미리 강해진다고 꼭 세상에 찌드는 건 아니야. 진홍색 정열 새로 배우기 시작한 태극권. 포즈를 잘 기억하지 못해 분투 중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태극권은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강좌 중 하나인데 탈의실 광경이 몹시도 유쾌하다. 플라멩코 의상으로 갈아입는 사람 옆에 발레 수업을 마치고 의상을 벗는 사람이 있다. 거기에 뒤섞여 태극권 팀도 옷을 갈아입니다. 평일 낮인 이유도 있어서 수강생들은 내 엄마뻘 세대인 50대와 60대가 중심이다. 화사함보다는 '왁자지껄'한 공간이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저녁 반찬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우는데, 항상 나도 모르게 집중해서 듣는다. 즐거운 대화만 있진 않다. 질명이나 간병에 관한 이야기도 들린다. 특히 간병 이야기는 고생이겠다 싶어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있다. 다만, 그런 말이.. 2021. 3. 11.